얼마 전 친구를 만나서 수다를 떨다가 격한 공감을 자아냈던 일이 있었다. '요즘 내가 멍청해진 것 같아.' 라는 말. 어떤 특정 에피소드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고, 일상생활을 보내면서 문득 '내가 왜 이러지.' 하는 순간들이 섞인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몇년 전 같았으면 너무나도 쉽고 순발력있게 대처했을 법한 대화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주춤거리는 순간이라던가, 말을 하다 말고 발음이 뭉개진다던가, 잘 기억이 날 법한 것들도 전혀 실마리도 못 찾고 헤맨다던가 하는 순간들. 단순히 내가 30대 중반이 되어 그런 것 아니냐고 하기에는, 더 나이 많은 40대, 50대의 주변사람들도 그런 일로 허둥대는 것들을 본 적이 많지 않은데 왜 유독 이러한 것들이 '나의 일'이 되어 내 일상속에 드러나는 것일까, 당혹스러움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고등학교 때 친구를 만나 속 시원하게 고민을 털어놓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이 가장 큰 공감을 불러 내다니. 친구의 고민 또한 나와 정확히 일치했다. 친구는 '내가 유독 무언가 노화를 일으킬 만한 식습관이나 생활습관을 가지고있는 건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유퀴즈에서 였나, 인간의 큰 노화는 34세에 한 번 온다고 하던데, 그게 내 얘기 같고 오랜만에 만난 내 동창의 이야기 같고 그랬다.
멍청해진 나를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울을 오가는 기차 안에서 고민을 해 보았다. 20대 중반 즈음 직장생활을 시작할 무렵, 매일같이 휘몰아치는 '빨리빨리' 직장 문화에 생각을 깊이 하는 습관이 사라진다고 느꼈을 때엔 종이 책을 여러권 사서 침대 머리 맡에 두고 읽기를 반복했다. '빨리빨리'가 깊이 습관처럼 자리잡아서 한 문장을 읽어도 20%정도만 머릿속에 들어오는 기분이 들 땐, 같은 문장을 여러번 읽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종이책을(5년전쯤엔가 전자책으로 갈아탔다) 사 읽을까, 전자책 조차도 결혼 후엔 혼자 조용히 읽을 시간도 심리적 여유도 없는데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걱정이 들었지만 일단 한번 가 보자 하는 마음으로 서점에 들렀다.
서점에는 여러 종류의 책이 있었다. 요즘 관심이 있는 분야, 이전에 관심을 가졌던 분야, 여기 저기 흥미가 닿는대로 서점 안을 휘젓고 다녔다. 그러다가 구석에 '필사' Section이 프로모션 중인 것을 발견하게 됐다.
필사에 관심이 갔던 것은 살면서 두번 쯤 있었다. 처음엔 결혼 준비를 할 때. 종교 서적에 대한 흥미가 떨어져서, '필사'라도 해서 관심을 가져볼까 했던 적이 있었다(실제로도 두세권쯤 사서, 한권쯤 적어보기도 했다.). 두번째는 작년 쯤에, 마음에 평온함을 얻고 싶기도 했고, 영어 공부도 일상생활에 녹여보고 싶어서 '영어 필사' 책을 몇 권 보다가,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도움을 받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 사지 않았다.
이전에 관심을 가졌던 분야이기도 하고, '필사'를 한다는 것은 20대 중반의 나보다 더 집중력이 떨어져있는 30대 중반의 나에게 좀 더 도움이 될 것 같은 일이었다. 가만히 매대에 서서 중간 중간 몇 장을 펼쳐보았다. 너무 진지하게 '힐링하세요', '자신을 사랑하세요' 라며 평온함을 강요하지도 않고, 글의 무게감과 미사여구가 적당히 내 마음에 드는 정도였다. 게다가 아래쪽엔 영문이 적혀있었다. 영문 역시 미사여구가 적당했고, 국문과 영문 중 '이 쪽이 번역본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양쪽 문장 다 자연스러웠다. 세번째 장 쯤 펼쳤을때, '사야겠다.' 이미 마음을 먹었다. 글의 내용이 너무나도 내 취향과 맞아 떨어져서. 알고보니 이 문장들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walden)'이라는 소설책의 내용들을 발췌하여 적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난 사실, '월든'이라고 적힌 것이 출판사 이름인가, 했지만.
그렇게 이 '필사노트 수집'을 사게 되었다. 목표는 매일 저녁 한 페이지씩 글을 적는 것. 최대한 천천히 적고 천천히 사유하도록 만년필도 하나 샀다(이 끊임없는 소비의 연결고리는 다음 글에 한번 더 써먹어볼까 한다 ㅎㅎ). 부디 나의 멍청함에 도움이 되기를. 부디 내가, 조금 덜 부끄러운 40대가 되는 데에 도움이 되어주기를.
*이 책의 가격은 26,000원.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는 7월 31일까지 필사를 마친 책을 가지고가면 2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주는 프로모션을 하고있었다.